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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씨(裵氏) 성씨(姓氏) 글자 ‘裵’와 ‘裴’의 유래

竹淸 2019. 3. 10. 14:48

배씨(裵氏) 성씨(姓氏) 글자 의 유래

 

흔히 성씨(姓氏) 경주(慶州) 배씨, 성산(星山-星州) 배씨(裵氏) 등에 관하여 운위(云謂)하면서 역사적으로

 꼭지가 있는 배()그렇지 아니한(꼭지가 없는) ()가 따로 있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언설(言說)

펴는 바를 보는데 도대체 말이 되지 아니한다.

 

배씨(裵氏)의 여러 계파 중 퇴계(退溪)의 제자였으며 관찰사를 지내고 사후 (死後) 서애(西厓) 유성룡(柳成龍)

 신도비문(神道碑文)을 작성한 바

 흥해배씨(興海裵氏) 임연재(臨淵齋) 배삼익(裵三益)의 후손들이 성씨 배자(裵字) 중 옷의() 부수(部首)의 머리 부분인

두돼지해 부수()”를 아래로 내려 ()”로 쓴 경우가 있어 그런 말이 생겨난 것 같아 보이는데,

 배씨의 자를 로 쓰거나 로 쓰거나 결국은 같은 글자이므로 아무런 문제될 바가 없는 것이다.

 

씨 혹은 씨의 성씨가 이루어진 유래와 그에 얽힌 설화를 살펴보면, 국조 단군께서 동남방 지방과 남해변을 순시하시고

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모실 때에 붉은 용 두 마리가 바다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는

 두 선녀가 자주색 함을 받쳐 들고 내려와 노닐다가 바닷가에 함을 두고 갔다.

 

단군께서 이상히 여기시고 그 함을 열어본즉 비의남아(緋衣男兒-자주색 옷 남아)가 들어 있었다.

 이는 필시 천신(天神)께서 지성에 감동되시어 신아(神兒)를 내려 주셨다고 믿고 양육케 하였다.

15세가 되자 체모가 장대하고 지기가 웅건(雄健)하였다.

 

단군께서는 그 신아(神兒)의 처음 착의(着衣)가 비의(緋衣)였으므로 자에서 를 빼고 를 부쳐서 성()로 정하고

 이름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천생(天生)이라 명명(命名)한 후 배천생공(裴天生公)을 남해장(南海長)에 봉()하여

이후 33세 동안 자자손손이 세습하게 하였다는 야사(野史)가 있다.

 

성씨 배()씨 중 옷의() 부수의 머리(()를 아래로 내려쓴 전통을 가지게 된 흥해(興海) 배씨와 연관해서는

또 다음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.

 조선조 명종(明宗) 때 배삼익(裵三益)이라는 어른이 계셨는데 자()는 여우(汝友)이며 호는 임연재(臨淵齋)

진사시에 합격할 때 답안지에 초서(草書)로 쓴 성명 3자가 너무나 흘려 쓴 명필이어서 호명자(呼名者)

그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裵三益쇠지개(衰之蓋)’로 잘못 호명하였는데

뒷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명종(明宗) 임금이 궁중으로 부르시고 칭찬하신 후

 자의 꼭지를 위로 써서 실수가 생겼으니 앞으로는 꼭지를 아래로 내려쓰라는 분부가 있어

그로부터 자로 쓰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.

 

한문자전을 보면 자와 자는 전혀 같은 글자로서 그 뜻은

(1) 옷긴모양(長衣貌), 옷치렁치렁함, (2) 천천히 이리저리 거닐음(徘徊), (3) (), (4) 나라이름 등으로 되어 있고,

 혹시 자가 자의 본자(本字)로 되어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자전에는 자가 자의 고()체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.

 

결국 자와 자는 어느쪽이 바르고 어느쪽이 틀린 시비곡직의 문제이거나

 꼭지 부분이 위에 있음과 아래로 내림에 따라 문벌의 차이가 나는 게 아니고 전혀 꼭 같은 뜻을 가진 같은 글자이니 어느 자()로 써도 다 옳다.

 

그러나 근자에 와서는 배씨 문중 대부분이 자로 쓰고 있고 밖으로 잡지사, 신문사 등 출판사에서도 자로 쓴 활자는 찾기가 어려운 형편이다.

 

결국 1982년에 배씨(裵氏) 종친회에서는 그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자로 통일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하므로

 앞으로 성씨 배자(裵字)를 한자로 기재하고자 할 경우 사람들은 그렇게 통일하여 성자 표기를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.

 


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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